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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국민한국생활

이별의 기억, 귀향의 시간

by 동경35년 202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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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보낸 세월, 다시 찾은 한국"

 

종로2가, 파고다공원 앞 외국어학원.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80년대 당시 대학가에는 외국어
열풍이 불고 있었다.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
학원에서 단 3개월 기초 문법을 듣고는, 원래라면
1년 이상 공부해야 들어갈 수 있는 최상급
프리토킹 반에 도전했다.
 
어림도 없는 실력으로 첫날부터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했고,
수업 중 한국어 사용이 금지된 그곳에서
나는 무모하게 버텼다.
그렇게 배짱 하나로 들어간 후,
시간만 나면 집옆에 있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손에는 일본어 사전을 들고,
배낭여행 온 일본인 또래 학생들을 찾아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일본인입니까? 나는 한국인입니다.
" "당신은 일본어를 잘하네요."?
"당신이 일본어를 가르쳐주면,
나는 당신을 안내해 주겠습니다.
" 이런 식으로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고,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인사동등을 함께 돌았다.
 
그리고 종로2가의 생맥주집으로 데려가,
프리토킹 반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며
일본어 스터디를 했었다.
그렇게 배우는 외국어가 진짜 살아있는
외국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피카디리극장
피카디리극장

대학 1학년을 그렇게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검은테 안경을 쓴 그녀가 학원에 들어왔다.
00여대 가정과 정지영입니다.
일본어는 1년 공부했고,
취미는 음악 감상과 독서입니다.
 
" 예쁜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관심이 있던 사람은,
한국 미쓰비시은행 서울지점에 다니던
사회인 누나였다.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커피값까지
내주던 그녀.
 
철학과 학생은 80년대에는 인기는 많았지만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던 시절이라,
그녀 같은 사람은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스터디 장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지영이가 신호등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 ?
" 그녀가 말했다. 책도 무겁고, 몸도 무겁다고.
말라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한 그녀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빼앗아 들어 주자,
그녀는 고맙다며 덥석 팔짱을 끼고 내게 기대왔다.

80년대였다.
길거리에서 남녀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샴푸 향기와 은은한 체취가
싫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관심한 척했지만, 학원에 그녀가 늦으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오늘 안 오나 싶다가도, 막상 오면 건성으로
인사하고 그녀의 옷을 유심히 살폈다.
 
한 번도 바지를 입은 적이 없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지는 싫어해?"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으면 입고 올게."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그냥 나는 치마 입은 여자가 좋더라.
" 그녀는 언제나 조용하고 무표정했지만,
내 말을 들을 때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자꾸 말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옆에 앉은 지영이의 향기와 조용한 숨결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당시 친누나는 내 여자친구를 철저히 관리했었다.
내가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던 터라,
얼굴이 예쁘지 않더라도 여성스럽고 지적이며
조용한 여자 지영이는 나에게는 신선 했었다.
하지만
친누나는 장난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그때는 사랑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한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책 얘기를 해도 막힘없이 대화가 통하는
그녀에게 점점 더 나는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유스러운 청춘을 만끽 하기 위해서
(그냥 놀고 싶어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설득해
1년만이라도 독립을 하겠다고 했다.
 
서울 한복판에 집이 있고,
학교도 서울인데 자취를 하겠다고 하니
당시의 사회통념으로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 경험 삼아 해보겠다고
우겨서 결국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자취라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 손하나 까딱 않라던 내가
물을 떠다 마시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았다.
"반찬 좀 가져와." 지영이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반찬을 종류별로 사 왔다.
나는그녀에게 화를 냈다.
"가정과 다니면서 김치 하나도 못 만들어?
" 그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가정과라는게 요리 가르쳐주는게
아니라는걸 알면서..
나는 그녀를 울렸다는 후회에 사로잡혔지만,
솔직하게 사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울지 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게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불을 켜보니, 지영이의 스카프였다.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스카프만
남겨두고 간 것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그녀는 스카프에
자신의 향기를 남겨두고 갔다.

아고라광장
아고라광장

나는 차가운 방 안에서, 그 스카프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앞으로그녀를 찾아갔다.
2시간을 기다리자, 저 멀리서 그녀가 보였다.
나는 멋쩍어 그냥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와 덥석 안겼다.
 
"00씨는 내 남자야.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 그때 알았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깊어져 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자취방에 지영이가
대려다 준것 까지 기억 하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코트차림에 머플러 까지
한채로 자고 있는 내옆에 바르게 정좌하고
앉아있는 지영이가..
괜찮아...하면서 걱정 스러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른아침에 왔구나 하고 미안해서
괜찮아 하면서 일어 나는데....
그녀의 복장이....한번도 같은옷을 입고 만난적이 없는데...
어제 만났을때와 똑같은 복장 인것 입니다...
너 집에 안가고 여기서 이렇게 밤을 새운거니 하니까?
지영이는 걱정되서 어떻게 집에가 하는것 입니다
... ........
평상시에도 9시까지 집에 들어 가야 하는 그녀 였습니다..
9시 넘으면 집밖에서 문열어 줄때까지
1,2시간을 기달려서 집에 들어가면 2시간을 무릅꿇고
앉아서 있다가 방에 들어가야 하는 룰이 있던 그녀 였습니다..
아버님은 000 대학교 학장님 어머니는 00여대 교수님..
정말 엄한 가정속에서 자란 그녀 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무단 외박 이라니....
 
난 망했구나..
집에 전화해서 누나에게 에스오에스를
달려온 누나가 너 이쇄끼 지영이 건들였어 하면서..
오른손이 날라 오는걸 잽사게 피하면서
그런게 아니고 라고 설명 하쟈...
누나가 지영이에게 너 어떡 할려고 이러니 하니까...
 
그냥 자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가기 싫었어요...
어휴! 하면서 누나가 우리집에서 잤다고 그래
내가 집에 같이 가줄테니까
어제 우리집에 놀러 와서 갑자기 기분이 나뻐져서
잠들어서 그냥 깨우지 안았다고.. 할테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누나는 지영이의 손을 잡고 지영이집을
갔다왔습니다..
누나왈...
거실에 삼면이 다 책이더라...
드라마에서 보는 교수님댁 분위기 그대로 이더라..
지영이 아버님 어머님 꼬박꼭박 존대말 쓰시고
지영이도 아주 정중한 존대말로 답하더라.
1시간 앉아 있었는데 한5시간은 된것 같더라
너 앞으로 어떻게 할레...
 
지영이 부모님은 어는정도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모르는척 하시는것 같더라 하면서...
철학과는 당시에는 인기가 좋아 들어가기는 힘들었지만
졸업후 진로가 학교에 남아서 교수가 되던지..
아니면 달리 할게 없던 그런과 였습니다.
(지금은 취직 분야가 많지만..)
졸업후 비죤은 없었죠
교편 잡을 생각은 전혀 없는 나였기에 졸업 하고
뭐해먹고 살래 하는 미래 비죤이 불확실한
나를 탐탁하게 생각 하지는 안았던것 같습니다.
 
의대,법대등은 다 먹고 살기 위한 직업훈련이고
즉,생계형 반면 철학은 북한 여성의 성해방을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었을 해야 하냐를 고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철학도의
고독한 삶을 선택한 인생 인것이죠..
부모님이 교수이신 지영이는 분명 결혼을 하게 되면
나를 교수로 키울려고 할것이 분명 하기 때문에
누나는 내가 교수엔 관심이 없다는걸 잘아는터이라
하는 걱정 이었지요...
 
외대에 지영이 아버님 강의
실은 지영이에게 비밀로 도강 하러 몇번 가서
먼발치에서 뵌적이 있는데...
정말 그냥 학자 였습니다..
코드가 맞지 안을듯....
그렇게 한해가 지고
3학년이 되면서 운동권에 운동이 격렬해 지기 시작 했죠..
1,2학년때는 선배들을 따라서 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리더가 되어 하지 안으면 안되는
분위기 였고 학교수업도 거의 없고 등교 수업거부등으로...
목이 쉬어라 훌라송을 불러 되고
불심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운동화를 못신고
마지막 교복세대로 때아닌 장발이 유행 했것만..
머리도 회사원 처럼 위장 하고.
취류탄에 취해서 해매일때 지영이는 몸조심 하라고 하면서
저를 멀리서 지켜봐 주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89년에 촬영한 여권사진

여권사진


 
집안사정으로 운동권에 들어 올수 없는 그녀를 잘 알기에
나는 지영이를 끌여 들이지 안고 마음으로
응원을 부탁 했었지요...
이미 그녀와 약혼 까지 하고 같이 밤을
지새운 사이 였습니다......
그런 혼란한 시간에속에서 초,중,고 대학 까지 동창인 친구가
분신자살을 하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지만..
지금 친구는 학교 캠퍼스 한켠에 열사 라는 칭호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2대독자인 친구 어머니가 서울대 합격 하고
차가운 시신으로 세진이가 집에 돌아 왔을때..
세진이집 마당에는 세진이가 쓰던 책상과 책
그리고 옷가지들이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죽은사람 물건을 소각 하기 위해서...)
 
저와 친구셋은 지명수배자가 되어 대구 필공산에
친구가 잘아는 절에 도피를 하였습니다.
도피생활4개월만에 주민에 신고로 체포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빨간색 번호판에 2114라는
숫자를 달고 허름한 모습으로 면회장에서
지영이를 6개월만에 보게 되었네요
... .........
가족밖에 면회가 안되어 우리누나 주민증을 가지고
사정해서 저희어머니와 함께 왔더군요...
이제 그만 해라 할만큼 했자나...
미안하다 나를 잊어 줘 라고 하고 행복해라
나같은놈 만나지 말고.. 그리고 접견실을
나왔던게 마지막 모습 이었습니다...

궁가엔터테인먼트
궁가엔터테인먼트

지영이의 우는 모습.... 접견실을 나서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지영이를 두고 차가운 감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구치소 생활이 끝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동안 가족들이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영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날 옭아맸다.
구치소에서 6개월을 보낸 후,
나는 결국 강제 출국 조치를 당했다.
운동권 학생으로 낙인찍힌 내게 한국에서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고,
정부는 나를 1년간 외국에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군인가족으로 군대를 면제 받을수 있는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강제로 영장 발부해서 군대로
보낼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대학 시절, 파고다 공원 앞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프리토킹을 하며 일본인들과 교류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막상
이곳에서 추방자의 신분으로 지내려니 가슴이 먹먹했다.
언어는 익숙했으나,
삶은 전혀 달랐다.
매일을 술로 보냈다.
 
1년이 지나도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머물던 일본에서 지금의 일본인 아내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어느덧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일본에서 일하고 가족을 이루며 정년퇴직까지 마쳤고,
이제는 홀로 한국에 돌아와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가끔은 문득 지영이가 떠오른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그녀의 미소, 그녀의 따뜻한 향기.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내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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