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태백산맥』, 『아리랑』 속에 등장하는 지주–마름–소작인의 구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동백꽃에서 태백산맥까지 — 지주는 없고, 마름만 미운 이유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으면,
시골 마을의 해맑고 투박한 정서 뒤에
묘하게 불편한 구조가 숨어 있다는 걸 느낍니다.
바로 지주 – 마름 – 소작인이라는
우리 역사 속 익숙한 권력의 삼각형.
이 구조를 조금 더 큰 틀에서 보면,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태백산맥』 속에서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있죠.
『동백꽃』 – 얼굴 없는 권력자와 앞장서는 하수인
『동백꽃』엔 지주도, 마름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주인공의 가족은 분명히 '남의 땅'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이 구조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마름이죠.
자기 땅도 아닌데 마치 주인 행세를 하며 소작인을 괴롭힙니다.
그게 더 밉습니다.
왜냐면 눈앞에 있으니까요.
직접 갑질을 하니까요.
실질적인 권력처럼 보이니까요.
지금도 반복되는 구조
예를 들면, 지금 시대의 구조도 그렇습니다.
- 대기업 = 지주
- 협력업체 대표 = 마름
- 하청 근로자 = 소작인
진짜 힘 있는 사람은 뒤에 있고,
실질적인 권력은 늘 중간 관리자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주보다 마름이 더 얄밉다고 느끼는 거겠죠.
눈앞에서 직접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을 몰아붙이는 쪽이니까요.
『아리랑』 – 피 흘리는 구조
『아리랑』에서는 이 구조가 훨씬 더 노골적입니다.
마름은 지주보다 더 앞장서서 소작인을 압박합니다.
왜냐면 자기 입지를 지키려면
‘더 열심히 괴롭혀야’ 하거든요.
지주는 말하지 않습니다.
마름이 대신 목소리를 높이죠.
가끔은 마름도 억울할 겁니다.
하지만 구조는 그에게 그런 역할을 시킵니다.
『태백산맥』 – 죄가 아닌데 죄를 짓는 사람들
『태백산맥』의 마름은 이중적입니다.
그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자기 생존을 위해 소작인을 누릅니다.
하지만 때로는 양심에 찔려
저항을 시도하기도 하죠.
“그는 지주의 손이었고,
소작인의 목줄을 쥔 채
자신도 스스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 문장은 마름이라는 존재의
비극과 책임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의 ‘마름’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마름’은 많습니다.
- 대기업 본사의 눈치를 보며 직원을 몰아붙이는 팀장
- 교육청 지시를 명분 삼아 교사를 쥐어짜는 행정 관리자
- 권력자의 뜻을 앞장서서 실현하는 ‘충성심 강한’ 관료
자기 권한이 아님에도
앞장서서 남을 누르는 사람들.
이들은 구조 속에서
때로는 더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권력은 조용하지만, 마름은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결론 – 마름이 밉지만, 구조를 보자
우리가 마름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직접 괴롭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진짜 ‘지주’가 있습니다.
마름은 구조의 일부고,
지주는 그 구조의 설계자입니다.
던지는 질문
혹시, 지금 우리는
어떤 구조 속에서 ‘소작인’처럼 일하고 있진 않나요?
혹은 누군가에게 ‘마름’처럼 행동하고 있진 않나요?
지금 시대에도
『동백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리랑』은 여전히 무겁고,
『태백산맥』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문학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시대가 변해도 구조는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